부자는 왜 아브라함 품에 안기지 못했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단순히 천국과 지옥이 존재한다는 가르침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위선된 신앙에 대한 경고와 종교인들의 회심을 촉구하는 가르침이 내포되어 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예수께서 ‘불의한 일꾼의 비유’를 막 끝내실 무렵이었다. 이때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 비웃었다(누가복음 16:1~14). 천국에 갈 자격이 충분하다고 확신했던 그들을 바라보시며 예수께서는 한 가지 비유를 베푸셨다. 바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다.

어떤 부자가 있었다. 이 사람은 언제나 가장 비싼 옷을 입고 매일 호화스럽게 살았다. 한편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는 한 가난한 사람이 누워 있었는데, 몸에는 부스럼투성이었다. 그가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기를 원했다. ··· 어느 날 그 거기가 죽어 천사들에게 이끌려 아브라함의 팔에 안겼다. 부자도 죽어 땅에 묻혔다. (쉬운성경 누가복음 16:19~22)

예수의 비유에는 정반대되는 두 사람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큰 부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절대적 빈곤에 시달리는 거지다. 부자는 날마다 흡족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는 큰 부자답게 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면 비유 속 부자는 누구일까. 이 비유를 하시는 예수의 시선은 ‘바리새인들’을 향했다(누가복음 16:14~15).

과연 바리새인, 대제사장, 서기관 등 종교 지도자들은 유대 사회에서 독보적 권력을 행사했다. 국내 한 대학의 명예교수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을 다 쥐고 있었다. 종교 지도자는 정치 지도자이자, 민간 지도자였고, 재판관이었다”고 말했다. 또 미국 매사추세츠 대학교의 한 종교학과 교수는 “종교 지도자들은 유다 종교를 대변하는 상징이었고, 하나님이 임명하신 사자로 간주되었기에 특별한 권리와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고 말했다.

반면 비유 속에는 빈곤에 시달리는 거지 나사로가 대조적으로 등장한다. 그의 피부는 종기 투성이다. 스스로 자신을 돌볼 수 없는 처지에 놓인 그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으로 허기를 면했다. 그렇게 전혀 상반된 삶을 살던 두 사람이 어느 날 죽게 되었다.

부자는 지옥에서 고통 가운데 있다가 눈을 들어 보았다. 멀리 아브라함이 보이고, 나사로가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소리쳐 말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제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혀를 적실 수 있도록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게 보내주십시오. 제가 이 불꽃 가운데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쉬운성경 누가복음 16:23~24)

예수께서는 지옥이 어떤 곳인지 상세히 묘사하셨다. 꺼지지 않는 불길 속에서 영원히 몸부림쳐야 하는 불행의 장소다. 거기에는 쉼도 없고, 즐거움도 없고, 기회도 없고, 고통을 피할 방법도 없다. 부자는 혀끝을 서늘하게 해줄 한 방울의 물조차 허락되지 않는 곳에서 극심한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 있다. 지옥에 간 부자는 이방인이 아니었다. 불신자(不信者)도 아니었다. 지옥에 갈 것이라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자,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당당하게 불렀던 유대인과 지도자들이었다(요한복음 8:33,39,41, 마태복음 3:7~9). 당시 사회통념상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부자는 틀림없이 천국에 가야 했다.

그러나 충격적 반전이 전개됐다. 전통이라고 자부하던 기득권 종교인이 지옥에 버려진 것이다. 그 누구보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던 그는 왜, 지옥에 버려졌을까.

부자의 요청과 하나님의 답변

고통에 처한 부자의 요청

James Tissot 作 고통에 처한 부자의 요청

부자가 말했다. ‘그러면 제발 부탁입니다. 아버지, 나사로를 내 집안에 보내 주십시오. 제게 형제가 다섯 명이 있는데, 나사로가 가서 증언하여서 그들이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아브라함이 대답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다. 그들은 그 소리를 들어야 한다.’ 부자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누군가 죽었다가 살아나 그들에게로 가면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대답했다. ‘만일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이 다시 일어나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쉬운성경 누가복음 16:27~31)

사후세계에서 ‘아버지’라고 불릴 존재는 하나님뿐이다(마태복음 6:9, 23:9). 비유에서 아버지라고 불린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표상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부자는 신앙인이다.

성경은 부자가 지옥에 버려진 이유를 기록한다. 그는 모세와 예언자들의 소리를 듣지 않았다. 그의 다섯 형제들 역시 모세와 예언자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지옥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소리는 다름 아닌 구약 성경을 가리킨다(누가복음 24:44).

하나님을 표상하는 아브라함의 답변은 성경 말씀의 권위를 강조한다. 구원은 혈통, 전통, 교파, 기득권, 신앙 경력, 교인 수에 있지 않다. 오직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믿음은 듣는 것에서 얻게 되고, 듣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얻게 된다(로마서 10:17). 즉 부자가 고통스러운 지옥에 버려진 이유는 지식이 부족해서, 기도를 덜 해서, 금식을 덜 해서도 아니다. 성경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과 메시지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의 다섯 형제들이 지옥의 심판을 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보고 있는 성경의 기록을 신뢰하고 믿는 것뿐이다.

만일, 부자의 요구대로 죽은 이가 살아나서 진리를 전한다면, 당시 종교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과연 자신의 생각과 고정관념을 모두 깨고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죽었다가 살아난 자가 있더라도

예수께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난 후의 일이다. 실제 인물인 나사로(Lazarus)가 병들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예수께 귀한 나드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의 발을 씻어 주었던 마리아의 오빠였다(요한복음 11:1~2).

예수께서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Bethany)에 도착하셨을 무렵에는, 이미 그의 시신을 안치한 지 4일이 지난 뒤였다(요한복음 11:17,39). 예수께서는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러자 손발과 얼굴이 천으로 감긴 채 나사로가 무덤 밖으로 나왔다(요한복음 11:43~44).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난 것이다. 조문하러 왔던 사람들은 이를 목격하고 놀라워했다. 그들 중 어떤 이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알렸다. 과연 바리새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누군가 죽었다가 살아난다면 그들은 회개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요청했던 부자의 말대로라면, 그들은 회개해야 마땅했다. 잘못된 신앙의 습관과 비성경적인 관례들을 버리고 예수께 나아가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도리어 산헤드린(유대 대법원)을 열어 예수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다(요한복음 11:53). 심지어 죽었다가 살아난 증인인 나사로까지 없애려고 했다(요한복음 12:10). 왜 그랬을까. 성경은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 곧 성경 말씀을 믿지 않았기에, 그 증거를 받고 등장하신 예수를 배척한 것이라고 기록한다(요한복음 5:46~47).

이후, 종교 지도자들은 또 한번 죽었다가 살아난 자의 소식을 듣게 된다. 바로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이다. 과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의 부활 소식에 그들은 회개했을까? 결코 아니다. 그들은 돈으로 경비병들을 매수했고,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 갔다는 거짓 시나리오까지 만들면서, 예수의 부활을 필사적으로 은폐하려고 했다(마태복음 28:11~15).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이 다시 일어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하신 예수의 말씀 그대로였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기간에 구약 성경을 하나하나 인용하시며 당신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증거를 받으신 그리스도임을 드러내셨다(요한복음 5:39~47, 누가복음 4:16~21, 18:31~33, 24:25~27). 예수의 탄생, 고난, 죽음, 부활은 성경의 기록 그대로 성취되었다. 종교 지도자인 그들은 예수님이 오실 메시아임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들을 충분히 보고 들었음에도 진리를 스스로 거부했다. 말씀을 외형적인 문자, 문장으로만 여겼을 뿐 믿음을 갖지 않았다. 껍데기 믿음에 불과한 그들을 향해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종교인’이라고 판정하셨다(마태복음 15:7~9).

오늘날 외식하는 종교인은 누구인가

외식하는 종교인

겉은 종교인이었지만 속은 불신자와 다름 없었던 바리새인들

성경은 과거의 역사이지만 현재를 보여주는 거울이다(고린도전서 10:11).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잘 들어라. ··· 숨겨진 만나와 흰 돌을 줄 것이다. 그 돌 위에는 ··· 새 이름이 새겨져 있다 (쉬운성경 요한계시록 2:17)

주 예수님은 산 돌이십니다 (쉬운성경 베드로전서 2:4)

겉은 하나님을 믿는 종교인이었지만, 속은 불신자와 다름 없었던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 그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품에 안기지 못한 이유는, 성경의 기록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3:29,33).

그러면 오늘날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수많은 종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인정하고 있을까. 성경은 감추인 만나를 주시는 예수의 새 이름의 등장을 기록하고 있다. 성경의 기록대로라면 성도들은 감추인 만나의 진리를 허락하신 예수의 새 이름을 알아야 하며, 그 이름을 불러야 한다. 그러나 대다수 교회들은 성경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만나가 무엇인지, 예수님의 새 이름이 무엇인지 가르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새 이름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새 이름’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요한계시록 3:12).

성경 말씀은 종교인들의 믿음을 재는 시험지와 같다. 산성 용액이면 붉은색으로, 염기성 용액이면 푸른색으로 변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성경의 기록은 영적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어 참 신앙인과 외식하는 신앙인을 명확히 가려낸다. 예수님의 새 이름이 등장한다는 성경의 기록은 오늘날 종교인들의 믿음을 재는 영적 시험지가 될 것이다.

내게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모두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 아니다. ··· 그 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주여, 주여,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이 악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거라.’ 하고 분명히 말할 것이다. (현대인의성경 마태복음 7:21~23)

겉으로 하나님을 잘 믿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훗날 지옥의 형벌을 선고받고 놀라는 장면이다. 이 사람들은 미신을 신봉하지 않았다. 비유 속 부자처럼 하나님을 믿었고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며 천국을 확신했다. 그러나 지옥 판결을 받았다. 예수님의 경고와 부자의 결말이 오늘날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참고자료>
‘인사이드R(1호): 예수를 죽여라’, 편집부, 2015. 7. 13.

 

4 thoughts on “부자는 왜 아브라함 품에 안기지 못했나”

  1. 말씀에 순종하고 항상 가까이 해야되어야 함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나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을 믿는 자녀가 되겠습니다~

  2. 천국은 교파나 교회 전통 혹은 신앙경력으로 들어가는 곳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성경을 10독 100독 했더라도 성경의 기록을 믿지 않으면 모두 무용지물이네요~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