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역사 – 중세시대에서 현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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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의 가톨릭 역사

가톨릭 역사, 그것은 유럽의 역사와 획을 같이한다. 로마가톨릭은 처음에는 로마제국의 비호를 받고 있었지만,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로마가 붕괴하자 자신들을 보호해줄 방패를 잃었다. 로마가톨릭은 게르만 민족에게 포교를 하여 신흥 게르만 국가 속에 녹아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 결과 일찍부터 가톨릭으로 개종한 프랑크왕국은 교황에게 영토를 바쳤고(754년), 교황은 프랑크 왕 샤를마뉴에게 서로마 황제의 관을 주었다(800년). 이러한 과정 속에 로마가톨릭은 중세시대에 프랑크왕국을 중심으로 한 서유럽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한편, 성상숭배 문제 등으로 로마 교황과 충돌해오던 콘스탄티노플 중심의 동방교회는 1054년경 로마가톨릭교회로부터 이탈했다.

중세시대 로마가톨릭의 교권은 황제를 무릎 꿇게 할 정도로 강대해졌다. 신성로마제국(독일)의 속권(俗權)과 성직서임권을 둘러싼 논쟁 끝에 교황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파문하자, 황제가 교황이 머물고 있는 카노사의 성문 앞에서 눈 속에 3일 동안 꿇어 앉아 용서를 구한 ‘카노사의 굴욕’이라는 유명한 사건은 당시 교황권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말해준다.

“교황은 태양, 황제는 달”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강대한 힘을 갖게 된 로마가톨릭은 1095년 “십자군에 참여한 자는 모든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라는 교황 우르반 2세의 연설 이후 7회에 걸쳐 십자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십자군은 엉뚱하게도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거나 유대인을 박해하는 등 많은 부작용만 낳고 예루살렘의 수복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십자군의 실패 이후 강대했던 교황권은 조금씩 약화되기 시작했다.

종교개혁

15세기가 되자 유럽의 경제력은 증대하고 생활은 현저하게 향상되었으나 반대로 가톨릭 역사 및 문화는 세속에 빠져들며 쇠퇴를 거듭했다. 권력을 둘러싼 싸움이 계속되면서 분열 끝에 대립(對立)교황이 출현하는가 하면, 성직자나 수도자의 무지와 도덕성의 퇴폐도 심하여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1517년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라는 결정적 계기로 개신교 즉 프로테스탄트교회가 성립하였다.

로마가톨릭은 1540년경부터 예수회 등에 의한 쇄신운동을 하였으나 십자군 실패와 종교개혁으로 약화되기 시작했고 교황권은 다시 회복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남으로써 파국을 맞게 된다. 1798년, 로마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프랑스혁명을 악마의 혁명이라고 비난했던 교황 피우스 6세(비오 6세)와 교황청을 로마에서 쫓아내고 교황령을 모두 빼앗아버렸다. 이듬해 피우스 6세는 프랑스 남부에 있는 발랑스로 끌려가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현대의 가톨릭

가톨릭 역사, 이는 그대로 끝나는 듯했지만 뜻밖의 반전을 맞이한다. 1929년에 무솔리니가 이끄는 이탈리아 정부와 ‘라테란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로마가톨릭은 세계 최소의 독립국인 바티칸시국(市國)이 되었다. 1962년 교황 요한 23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어 교회의 현대화, 에큐메니즘(ecumenism, 교회일치주의) 등을 선언하였고, 이례적으로 동방정교회와 개신교에서도 참관인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공의회 이후 로마가톨릭은 미사와 전례에서 라틴어 대신 자국어를 사용하게 하고, 현재까지 개신교, 동방정교회 등 여타 종교와의 연합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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